내가 네게서 묵은 적은 얼마나 적은가 (KR)

내가 네게서 묵은 적은 얼마나 적은가

이상철 개인전: 지나가는 방

온수공간 2021.6.10-6.30

안소연 미술비평가

❉ 세 개의 형상, 두 개의 벽에 각각 기대어 서 있는 세 개의 형상과 마주했을 때,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으나 동시에 내가 알고 있는 어떤 것이라는 다른 생각이 마음 속에 있었다. 투명한 유리가 일으켜 세운 저 부드러운 침낭의 유연함을 바라보면서, 나는 그 둘을 받치고 있는 한 쌍의 각목이 두 발로 걸을 수 있는 2족 보행의 환영처럼 느껴져 한동안 그에게 다가갈 수가 없었다. 온도, 체온이라고 말했어야 했나, 단지 차가운 유리와 닿아 있는 침낭의 내부가 회색 천으로 구분되어서 푸른빛을 반영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전기 램프의 붉은 일렁임을 연상시켰다. 그와 그녀가 말(들의 중얼거림)을 주고 받았던 어느 소설 속 “좁고 긴, 아마 비정상적으로 긴” 방을 떠올렸던 것은, 투명한 유리에 비친 바깥 풍경 탓에 비어 있음이 계속되어 왔던 이/그 방에 내가 발을 들여 놨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지나가는 방⟫에서, 나는 그곳에 없는 누군가의 몸을 떠올렸다. 그곳을 서성이며 어떤 사물들과 마주했을 눈, 발, 손, 무릎, 등, 허리, 이마, 그의 영혼을 상상해 보려 했다. 은둔의 시간에 빗댈 만큼, 몇 발자국의 크기로 가늠되는 공간에서, 사물의 모양과 움직임과 그것의 자리를 따져보느라 여념이 없었을 그의 시간을 향한다. 이 방 안의, 사유의 행위가 남겨놓은 흔적들을 쫓는 일은 또 다른 고립을 뜻한다. 창문 밖 풍경들도, 안으로 굴절된 빛도, (심지어 그가 아직 사유하지 않았을, 내 몸이 몰고 간 비와 천둥소리도), 방 안에 어떤 모양을 만든다. 그 모양은, 방이기 위한 것으로, 명백하지 않고 객관적이지도 않고, 단지 한 순간 방 안에 고립된 채 우두커니 서 있는 무심한 처지를 따른다.

   방, 그는 그곳을 사물과 이미지와 글로 느슨하게 채워 놓고 집중해서 무언가를 보(이)려/들으려/말하려 했으나, 자기 자신의 머리 상자라도 됐는지, 계속해서 방-벽, 천장, 바닥, 모서리, 창, 계단, 문-으로 되돌아 왔다. 방 안에 고립된 형상들은 그렇게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어쩌면 자신의 형태를 가두고 있는 모든 폭력과 공포로부터 벗어나 스스로 아무렇지 않게 사라질 것들이 되는 오류의 순간일지 모른다. 오류. 그는 내게 너무 다정한 것에 대해 경계한다는 말을, 느리고 신중한 목소리로 전했다. 중립적인 상태, 이 방 안에서 사물과 보낸 고립의 순간을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무심한 것들에 반응합니다.” 무심한 것들에 반응한다는 말이, 내게는 너무 다정하게 들렸다.

   그는 사물을 공간에 안겨 놓고, 그 둘 사이의 모양이 (약간) 차가워질 때를 생각했다. 그랬을 테다. 서로가 서로의 (폭력적인) 질서에서 벗어나, 알아보지 못할 어떤 현존으로 서로를 (혹은 자신을) 바라보는 망각의 순간이 온다. 이 방은, 자기를 가둔 단단한 공간의 전제들로부터 벗어나, 모든 형태들이 머물다 지나가는, 그것을 끝없이 반영하는 회색의 모양 같은 실체다. 하지만 회색은 하나의 색이 아닙니다. 다른 색들에 비해 종류가 많고 포괄적입니다. 심지어 붉은빛의 혹은 푸른빛의 회색도 있습니다. 회색은 흰색처럼 다른 색을 반영합니다. 회색은 생각보다 복잡합니다. 아마 당신이 이야기하는 색은 구체적인 색이 아니라 회색의 모양에 대한 이야기일지 모릅니다.

❉ 차가운 유리와 맞닿아 있는 침낭, 이 세 개의 서로 다른 형상은 <untitled(facade)>(2015/2021)라는 단 하나의 이름을 소유하고 있다. 방의 빈 벽과 투명한 유리면 사이에, 그 둘의 크기와 무게를 따르며 스스로 또한 그것을 의식하고 있는 것처럼, 서로 다른 세 개의 침낭이 잠을 자지 않는 렘 수면 상태로 일으켜져 있다. 그것은 (똑같은) 형태를 강요하는 폭력인가. 그렇다고 하기에는 이 수동적이고 무심해 보이는 침낭이 (잠을 잊고) 일련의 크기와 무게와 2족 보행의 모양까지 제 안에 스스럼 없이 반영하고 있지 않은가. 그는 마주하고 있는 벽에 세 개의 형상을 정면으로 보게 하고, 벽과 벽 사이에서 마주하고 있는 창문 밖의 풍경들을 굴절시켜 아무렇지 않게 사라질 것들을 그 품에 안겨 놓았다.

❉ 세 개의 형상이 있던 방에서 벗어나면, (아직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채) 한쪽 벽이 등을 맞댄 것처럼 서로 붙어 있는 또 다른 방이 나온다. 침묵과 고립 속에서 누군가가 묵었던 방처럼, 어떤 사물이 공간에 파동을 일으키려 한다. 저 평평한 벽과 바닥과 천장이 신원을 확인할 수 없는 익명의 다른 이름으로, 내 발 앞에까지 와 있다. <untitled>(2021)는 접이식 나무 옷걸이를 연결해 공간 속에 어떤 궤도를 만들어 놓고 그 끝을 바닥 어딘가에 무심하게 내버려둔 정황을 보여준다.

    “우리가 아는 것을 무시하도록 해보자.” 『기다림 망각』에서 블랑쇼는 ‘그’와 ‘그녀’의 대화 사이에, 침묵과 듣기의 끝없는 기다림 속에, 우리가 아는 것에 대한 망각을 제시했다. 그는 어떤 말들과의 씨름,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관계를 유지하려는 노력, 그것의 끝이 저 방 안에 펼쳐진 궤도처럼 뚝 끊어져 내 발 앞에 놓이게 되는 그 순간의 서늘함에 대해 말했다. 나는 저 접이식 옷걸이의 거대한 궤도를 따라 돌아 나와, 두 개의 끝점이 마주 놓인 바닥에 두 발로 서서 작은 보폭을 왕복하며 둘을 잇는다.

   그는 나보다 먼저 와서 이 방 안을 서성이며 저 사물과 (빈) 공간의 관계를 규명하려 애썼을 것이다. 그에게서, 사물의 형태인지 공간의 형태인지 모를 임의의 추상적인 궤도가 “이 방 안의 빈 곳을 주시하는” 사태에 이르도록 했을 테다. 그가 옷걸이에 대한 기억을 말했다. 그의 방 안에 늘 걸려 있던 접이식 나무 옷걸이에 대해 내게 말할 때, (그와 나의 시선이 잠시 뒤바뀌었던 것처럼,) 그를 매일매일 봐왔던 “그 사물”의 (기억의) 욕구를 그는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그 사물이 알고 있는 것을 둘 사이에 현존하도록 도왔다.

❉ “지나가는 비”라는 말이 있다. 곧 사라질 (미래의) 것으로 존재한다는 이 말은 농담 같다. 아무도 그것이 차가운 비라는 것을 믿으려 하지는 않지만, 허공으로 사라지기 위한 이 망설임을 지켜본다. 지나가는 비는 여름비처럼 세차게 쏟아지지 않아도, 온몸을 눅눅하게 적신다. 그가 “지나가는 방”이라고 말한 이 좁고 긴 방에 들어섰을 때, 나는 무겁고 차가운 느낌의 좌대가 나와 마주하고 있는 저 몇 발자국 건너편의 미래 사이에 놓여 있다고 생각했다. 나와 미래 사이의 공간, (과거와 현재에 서 있는) 나는 저 통로 같은 공간을 어떻게든 지나갈 테지만, 알 수 없는 형상들이 놓여 있는 무겁고 차가운 좌대라는 것이 나에게서 내 몸의 오차를 자꾸만 의식하게 한다.

   <untitled(농담)>(2021)이 진담처럼 묵직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나와 저 방 끝의 어디론가 향하는 계단 사이에 무심하게 놓여 있는 흰 색 조립식 선반 때문이다. 그것은 차라리 방 안에 붙잡아 놓은 또 다른 방이라고 말해도 좋을 크기와 모양을 가졌다. 그 무심함 탓에 좁고 긴 방은 (마침내) 몸 하나가 지나갈 정도의 통로가 되었고, 선반 밑으로 짙은 그림자를 갖게 되었다. 그 길목에서 차가운 흰 색 선반들은 창 밖을 향하던 시선을 안으로 깊숙이 붙잡아 두곤 한다. 선반은 수직 수평의 구조 외에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았고, 그렇게 장소 안에 고정되어 있는 퇴적물처럼 보였다. 아, 저기 아무 것에도 얽매이지 않은, 선반 선반이기 위해 필요한 허수처럼, 내가 본 것과 일치하지 않는 선반의 모양을 스스럼 없이 재현하고 있는, 저 둥근 거울을 보라. 차가운 사물 바깥에서 농담을 던지는 저 무심한 표정에, 나는 (나만 알고 있는) 다정한 시선을 보냈다. 이미 저만큼 지나가 있는 거울(방) 안에는, 선반 아래 드리워진 그림자만큼이나 이 거대한 흰 색 사물이 공간과 관계 맺는 특별함을 반영하고 있다. 시선이 닿지 않는 선반 꼭대기에 덩그러니 누워있는 소화기는, 어두운 곳에서 순간적으로 눈을 멀게 하는 전기 램프의 붉은 일렁임 같았다. 여기에는 긴장이 있습니다.

❉ 그는 방을 항해 중이다. 그것은 (투명한) 창과 (막힌) 벽으로부터 시작해 고립과 해방, 폭력과 자유, 우연과 필연, 사고와 감각 등의 대립적인 상황을 동시에 반영하며 교차시킨다. 그가 조성한 공간 속 사물의 모양은, 스스로를 규정하던 모든 전제들로부터 벗어나 그것의 (명료한) 현존을 위하여 환경과 관계 맺기를 자처한다. 일련의 행위를 결정하지 않은 채, (도리어 강요된 행위의 단서를 소거한 채,) 사물은 공간이 되었다가 물질이 되었다가 형상이 되었다가 다시 제 형태로 되돌아 오기를 반복하는 사유를 이끌어낸다.

   기다림과 망각 사이에서, 그는 방 안의 모든 사물들이 차가운 물처럼 파동을 일으키는 순간을 찾는 게 분명해 보인다. 그것은 내심 침묵에 가까울 정도로 명료한 공간 속 사물의 배열 혹은 그들의 필연적인 관계 속에서, 어떤 사유의 반전과 (불가피한 모순을 안고서라도) 요동을 일으키는 중립적인 상태에 대하여도 거리낌이 없다. -필연에서 벗어난, 그렇다면 우연인 걸까?- ⟪지나가는 방⟫에서, 한쪽 면에 큰 창을 연속해서 가지고 있는 방(들)의 배열은 그에게 (불)가능을 암시했을 테다. 불가능은, 공간과 사물로 침범해 들어오는 모든 외부의 상황들 때문이다. 평온하지 않은 삶, 내가 아는 누군가의 독백처럼, 매일매일 재난이 쏟아지는 삶, 그곳에서 떠내려 가지 않기 위해 어떤 섬처럼 고립/중립이 필요하다면, 저 창에 맞서는 단단한 벽에 안겨 방 안의 모든 것을 반영하는 몸의 현존이 되어야 하리라. 항해하는 몸, 항해하는 장소, 항해하는 섬.

❉ 네 번째 방에서는, (그 대신) 화면 속에서 hairy robot-털이 많은 로봇-이 외부인들을 맞이한다. 셜록, 살찐창자, 교수형, 나이키조던, 붓다인더가든이 hairy robot의 채팅방에 등장한다. 대화가 시작되고, 닉네임을 사용하는 5인의 남성들은 (임의의 방에 고립되어 있을) hairy robot을 보기 위한 혹은 알기 위한 시도를 숨기지 않는다. 당신의 진짜 모습을 보고 싶어요. 내가 원하는 음악을 틀어줄 수 있나요? 당신의 조명이 나의 욕망을 부추깁니다. 대화 중간에 해피타임, 이지지젝이 채팅방에 등장한다. 그것은 연민인가요? 말을 독특하게 하네요.

   그는 이 대화의 스크립트를 써서 56페이지 분량의 책으로 만들었고, 그가 쓴 서사에 맞춰 그의 동료가 hairy robot 채팅방을 비디오 작업으로 만들었다. 그와 그녀의 <hairy robot>(2021)은 같은 이름을 쓰지만 다른 모양을 가지고 있다. 중첩된 화면 창의 이미지를 디지털 프린트 한 두 개의  <untitled>(2021)도 비슷한 정황을 보여준다. 같은 이름을 한 다른 모양. 혹은 자신의 “진짜 모습”을 평온하게 고립시킨 (허수의) 닉네임들.

   세 개의 방을 지나 나무 계단 위에 자리한 좁은 방 안에, 그는 쏟아져 들어오는 채광도 아랑곳 하지 않고 그조차도 알 수 없는 익명의 반짝거리는 공간들을 물건처럼 옮겨다 놓았다. 책/글과 비디오/영상과 사진/이미지로 말이다. 공간은 사물이 되고, 사물은 이미지가 되고, 이미지는 글이 되고, 글은 말이 되고, 말은 몸이 되고, 몸은 공간의 현존이 된다. 이 방 안을 서성였던 그의 사유에 의해, 임의의 “그것/그”와 “그것/그녀” 사이의 거리는 서로의 관계를 정립하기 위해 끝없이 조정된다.


*이 글의 제목은 모리스 블랑쇼(Maurice Blanchot, 1907-2003)가 쓴 L’attente L’oubli(1962)의 한국어 번역본 『기다림 망각』(2009)에서 발췌했다. 이 글에서 볼드체로 표기한 단어는 이상철이 쓴 『hairy robot』(2021)을 읽고 기억에 남겨진 파편적인 것들로, 내 문장들 속에서 그의 말을 구분해낼 수 있는 어떤 표식이 필요했다. 특히 이탤릭체의 문장은 『hairy robot』에서 그대로 옮겨온 것이다. ⟪지나가는 방⟫에서 그와 긴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바깥에는 둘의 대화를 차갑게 식히는 여름비가 어떤 책의 마지막 문장처럼 세차게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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